• 최종편집 2024-03-12(화)

인물이야기
Home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실시간뉴스
  • SNS 접속 장애로 겪었던 어려움과 깨달음
    [시니어투데이] 나는 요즘도 매주 월요일 밤에는 1시간씩 동호인끼리 영어 번역 공부를 하고 있다. 전화를 이용하다가 얼마 전부터 화상회의 앱 ‘줌(Zoom)’을 통해서 화상으로 서로 얼굴을 보며 하고 있었다. 그런데 3주 전부터 줌(Zoom)에 연결이 안 되어 나만 참여하지 못하고 있어 속상해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아무런 접속 장애 없이 잘 사용했는데 웬일일까? 그런데 연결만 하려고 하면 내 휴대폰의 와이파이 신호가 사라지면서 연결이 안 되었다. 공유기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도, 휴대폰을 껐다가 다시 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내 접속을 기다리는 동료들에게 나를 기다리지 말고 공부를 시작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혼자서 아무리 애써보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결국은 포기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각종 해결 방법들을 시도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일주일 후에 휴대폰에 와이파이 신호 세기가 강하게 표시되기에 다시 연결해 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알 수 없는 장애로 연결이 안 된다”는 메시지만 뜰뿐 접속이 안 됐다. 그날도 나는 허탕을 쳤다. 몇 시간을 씨름하여 교재를 다 번역해 놓고 공부 시간만 기다렸는데 접속이 안 되니 속이 많이 상했다.   이 방면에 능숙한 지인에게 요청해서 시도를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아내의 휴대폰으로 하면 접속이 잘 되었다. 전화기 때문인 것 같아 A/S 센터에 가보았지만, 휴대폰의 문제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A/S 센터에서 공유기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통신사에 고장 신고를 하여 온라인으로 점검을 해보아도 정상이라고 했다. AS기사가 방문을 해서 전파 측정기로 검사하더니 신호가 잘 잡히니 공유기는 정상이라고 했다.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인터넷에서 “Zoom 연결”, “와이파이 끊기는 문제”를 몇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검색했다. 어디엔가 전화기의 와이파이 문제를 해결할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마지막으로 휴대폰에서 “네트워크 설정 초기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지시한 대로 따라 해서 초기화를 시키고 사뭇 긴장된 마음으로 연결을 시도했다. 놀랍게도 연결이 되었다. 2주 동안 못 보았던 동호회 회원들의 얼굴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이제는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 줌(Zoom)으로 한창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데 휴대폰에 “데이터가 다 소진되어 이제부터는 요금이 부과된다”는 메시지가 뜨는 것이 아닌가.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데이터가 모두 소진되어 있었다.   추가 사용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요금이 부과되어 있었다. 그동안 줌(Zoom)을 연결하는데 와이파이가 아닌 휴대폰 데이터를 사용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마지막 방법은 공유기를 바꾸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새로 구입한 공유기에는 안테나가 네 개나 달려있었다. 설명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공유기 밑면에 비밀번호가 있다고 쓰여있다고 했다. 그 번호를 입력했더니 와이파이 기호가 떴다. 이제 다시 접속을 시도했다. 드디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지금도 전에 사용하던 공유기에서는 아내 휴대폰은 되고, 내 것은 왜 안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디지털 기기는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자주 애를 먹이지만, 시니어들에게는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그러더라도 지치지 말고 차근차근 풀어가다가 보면 끝내는 해결할 길이 나오는 것이다. 시니어들의 자산은 풍부한 경험과 그로 인해 축적된 지혜다.   이것이 바로 시니어들의 경쟁력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하지 말고,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이 또한 시니어들의 저력이 아니겠는가?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1-06-07
  • SNS 사용에서 주의할 점과 대응 지혜
    [시니어투데이] 며칠 전 새로 들어온 이메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도착하는 이메일은 그중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일단 삭제하고 남은 것들을 시간 나는 대로 읽어본다.   그중에 한 SNS에 ‘친구 요청’이 있다는 메일이 와있었다. 그 SNS에서 보내주는 이메일 가운데 모르는 사람에게서 오는 요청이 많아 보통은 삭제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Jennifer라는 사람으로부터 요청이 왔다. 외국인이 요청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경우라서 열어 보았다. 나의 SNS 계정에 들어와 내가 쓴 글들에 ‘좋아요’ 표시를 여러 번 해 놓았다.   계정에 들어가서 둘러보니 귀엽게 생긴 아가씨다. 군복을 입고 동료들과 찍은 사진도 여러 장 보였는데 아마 여군인 모양이다. 그런데 며칠 후 메시지가 와있어 열어보니 ‘제발 좀 친구로 추가해주세요’라고 한글로 쓰여 있었다. 친구 요청을 거절한 경우가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다시 요청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까짓것 별일이야 생기겠나 싶어 ‘친구 요청’을 수락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이메일을 열어보니 내 SNS 계정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자기는 시리아에 있는 미국 군인인데 반갑다고 인사를 보낸 것이었다. 나도 반갑다고 간단하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메일을 열었는데 별도의 메신저로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열어보니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자기는 한국계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7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지만, 씩씩하게 자라서 군인이 되어 지금 시리아에서 정보통신 업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나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커다란 시련을 겪어서 힘들었겠지만 씩씩한 군인이 되었다니 장하다고 대답해 주었다.   나는 시리아라면 한밤중 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몇 시쯤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새벽 2시라고 했다. 그래서 밤이 늦었으니 다음에 얘기하고 어서 가서 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야간 근무 중이라 괜찮다고 했다. 전화로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묻는다. 가르쳐 주었다.   잠시 후에 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연결하는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통화는 안 되었다. 잠시 후에 메시지가 왔다. 군사시설이라서 보안 때문에 통화가 어렵다고 하면서 ○○톡을 하느냐고 물었다. 물론이라고 했더니 ○○톡 아이디를 묻는 것이었다. ○○톡은 아이디가 없이 그냥 이름으로 등록이 되었는데 아이디라니? 그래서 아이디는 없다고 하니 잠시 후에 자기 아이디를 알려주며 친구추가를 부탁했다.   우여곡절 끝에 ○○톡 연결이 되었다. ○○톡으로 “얼굴도 보고 목소리도 듣고 싶었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통화할 수 없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점차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SNS 프로필을 보고 가장 믿을만한 사람으로 당신을 선택했다. 자기는 자살폭탄 공격이 심한 이곳에서 군에서 퇴직하여 민간인으로 살고 싶다. 얼마 후 한국으로 돌아가 사촌들과 조부모님도 찾아 정착하여 살고 싶다. 자기를 좀 도와 달라”는 요지의 부탁이었다. 나는 시골에 사는 노인이라서 도움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갈수록 다음과 같은 놀라운 요지의 말을 늘어놓는다. 수색 중에 큰돈을 발견했다. 아마 저항군들의 군자금인 것 같다. 아무도 모르게 이것을 네 명이 나누기로 했는데 자기 몫은 5백만 달러쯤 된다. 달러가 가득 들어 있는 철제상자와 전투 현장의 사진들도 보냈다.   “한국 정착자금으로 사용할 이 돈 상자를 화물로 보낼 터이니 보관을 부탁한다. 자기는 물건이 도착한 2주 후에 한국에 입국하겠다. 액수의 30%를 수고비로 드리겠다. 주소를 알려 달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돈도 싫고 조용하게 살고 싶은 노인이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을 찾아봐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제발 도와 달라. 당신이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매달린다.   나는 아침에 아내와 공원에서 조깅한 후 시장에 들려오기로 한 터라 더는 붙들고 있을 수도 없어 그냥 ○○톡을 끝내고 외출 준비를 했다.   어린이날 손자들을 데리고 아들 내외가 왔을 때 그런 해프닝이 있었다고 얘기를 하며 ○○톡을 보여주었다. 아들은 이런 사건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가끔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며 낯선 메시지는 무시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말했다.   SNS에 프로필을 노출하다가 보니, 편리함도 있지만, 범죄에 악용될 소지도 없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과도한 사생활이나 개인정보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SNS가 편리하고 관계를 통해 존재의 힘을 과시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폐해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1-05-21
  • 과학도를 꿈꾸며 2021년 대학 생활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시니어투데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팬데믹(pandemic)으로 온 세상이 힘들었던 2020년이 저물어가던 즈음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대학에 지원한 외손자의 합격 소식이었다.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외손자가 희망하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기에 무척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외손자는 초등학생 때부터 유난히 과학을 좋아했고, 학교 대표로 출품한 각종 과학 관련 대회에서 자주 입상하여 학교에서도 주목받는 아이였다. 명절 때 외가인 우리 집에 오면 과학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다. 그런데 너무 수준이 높아 공대를 나온 나도 대답하는 데 쩔쩔매기가 일쑤였다.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친구에게 도움을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을 했지만, 자신의 전공 분야 외에는 아는 것이 일반인과 다르지 않으니 이해해 달라고 사양했다.   한번은 가족 모두가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큰일이 벌어졌던 일도 있었다. 외손자가 중학생 때였는데 엄마, 아빠가 모두 외출하고 없는 시간에 혼자서 주방 식탁 한쪽에 실험도구를 차려놓고 화학실험을 하다가 폭발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로 외손자는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 얘가 입원해 있다는 화상 전문병원에 가보니 얼굴과 손이 온통 붕대로 감겨있어 눈앞이 캄캄했었다. 다행히 몇 달 후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퇴원하여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얘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와서 종이로 만든 우주선을 건네고 갔다. 어느 날 책장에 올려놓은 그 종이 우주선을 보고 소망을 담아 적어 본 시다.   종이 우주선   책장 위에서 발사대기 중인 U-3069호 종이 우주선 언제 창공으로 솟아오를까?   우주과학자가 되겠다는 꽃 같은 우리 외손자 놀러 와 만든 꿈을 기도 속에 키워주었다.   주방 한쪽 너의 작은 실험실에서 들린 폭발음은 먼 훗날 네 종이 우주선이 날아오를 전주곡이었을까.   온통 붕대밖에 보이지 않던 그날 병실에서는 가슴이 내려앉았었는데   이제는 그 꿈 펼칠 나날 그리며 쉼 없이 달려가는 네 모습이 할아버지 마음에서 행복하게 솟아오르고 있구나.   나는 과학도로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될 출발을 앞둔 외손자와 이와 같은 길을 걷게 될 많은 젊은이에게 축복과 함께 기대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과학자는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야 할까.   과학 연구에 대한 과학자의 태도는 인류의 삶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것이다.   교통기관의 발전에 이바지함으로써 인간의 활동 범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인류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생명공학의 발전은 질병과 식량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비로운 힘이 되었다. 이제 인공지능, 로봇 등의 발전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활짝 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과학자들이 인류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인류에 대해 남다르게 따뜻한 감성을 지녀야 한다. 겸손한 마음과 뛰어난 공감력 및 소통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룬 성과이고 이루어갈 미래인데 왜 그래야 하는가?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부모와 두뇌 및 신체적 조건 그리고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은 한 개인은 자신과 인류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수한 자질을 지닌 것과 그에 따른 노력으로 얻은 결과는 그 개인의 영광임과 동시에 인류의 공적 자산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의 삶은 그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연구하는 분야의 수많은 선행연구자의 연구 성과와 그를 가르쳐준 많은 스승 그리고 국가적 지원 등 주변의 다양한 도움도 내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과학자들은 남다른 시대적 사명을 지녀야 하고, 그만큼 보람도 크다고 본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고 그에 따른 사명감과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남다른 자질을 지닌 사람은 그만큼 영광도 크기에 그에 따른 사명감을 보람으로 여기는 넓은 마음과 안목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수한 자질을 바탕으로 뜨거운 열정과 큰 노력으로 이루어낸 대학 입시 결과로 과학도로 출발할 시점을 앞둔 모두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자신의 발전을 통해 인류의 행복에도 이바지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한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1-01-11
  • 차량용 빗물받이 교체, 직접 해결하다
    [시니어투데이] 언제부터인가 내 차의 조수석 뒤쪽 좌석 창문 위에 달려있던 빗물받이가 한쪽이 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눈에 거슬리기는했지만, 중요한 부품도 아니어서 그대로 타고 다닌 지가 1년이 넘은 것 같다. 그러다가 얼마 전 좁은 길을 지나는데 물건을 내리려고 주차하고 있던 화물차 기사가 갑자기 뒷문을 열어젖히는 바람에 내 차의 조수석 백미러가 떨어져 나갔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아내는 놀라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려서 보니 앞바퀴 윗부분과 그쪽 문에도 흠집이 생겨있었다. 물론, 화물차 기사가 100% 자신의 과실이라고 인정하여 그쪽 보험사의 부담으로 수리를 다 마쳤다.   수리를 마치고 며칠 후에 보니 조수석 창문에 부착되어있던 빗물받이도 일부가 깨져 있는 것이었다. 그때 사고로 깨진 것이 확실하지만, 뒤늦게 청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를 알고 나니 눈에 거슬려 과감하게 새것으로 교환하기로 했다.   집 부근의 카센터에 가서 교환을 부탁했더니 일을 맡지 않으려 했다. 차량용 부품점에 가면 부품을 살 수 있으니 거기에서 사서 붙이라는 것이었다. 수리비를 많이 받을 수도 없는 하찮은 일에 매달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센터에서 알려준 곳으로 가서 아무리 찾아봐도 차량용 부품점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순간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온라인 쇼핑몰에서 차량용 빗물받이를 검색하니 차종별로 많은 제품이 올라와 있었다. 거기에서 내 차에 알맞은 빗물받이를 선택하여 주문했더니 며칠 후 물품이 도착했다.   택배로 도착한 빗물받이를 가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파손된 것을 떼어내기만 하면 나도 쉽게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단단히 붙어있어 조각이 떨어져 나가도 일부는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수리를 의뢰하러 카센터로 갈까 하다가 좀 더 해 보기로 하고, 혹시 몰라 비상용으로 글로브 박스(glove box)에 넣어두었던 드라이버를 몇 년 만에 꺼내 들었다. 오늘따라 기온도 낮았고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힘을 내서 드라이버를 틈새로 끼워 넣는 등 한참 동안을 씨름해서 겨우 모두 떼어낼 수 있었다.         새로 산 빗물받이에는 양면 접착테이프가 붙어있었고, 그 표면에서 보호용으로 부착된 종이를 떼어낸 다음 적당한 위치에 단단히 붙였다. 이렇게 하면 될 것을 그동안 깨어진 빗물받이를 달고 다녔던 것이 안타까웠다.   요즘은 차량용 이외에도 소비자가 손쉽게 수리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 용품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시도를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쉽게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불편함을 처리하고 발전적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용기와 도전 의식이 필요하다.   특히, 시니어들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보다 체력과 역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시니어들에게는 일평생 쌓아온 경험과 지혜가 있지 않은가.   장비를 쓰는 것이나 조작과 사용이 편리하게 만들어진 용품들이라면 이를 하는 데에서는 힘보다는 지혜가 더 가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니어의 강점이고 더욱더 힘차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아니겠는가.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0-11-30
  • 컴퓨터 없는 생활에서 느낀 소회
    [시니어투데이] 내가 사용하고 있던 컴퓨터가 자주 말썽을 부린지가 여러 달 되었다. 아들이 쓰던 것을 가져와 오래 써왔다. 그동안 바이러스 때문에 포맷도 여러 번 했다. 얼마 전부터는 커서가 꼼짝하지 않기도 하고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정상적으로 컴퓨터를 끄지도 켜지도 못해 강제로 전원을 꺼야 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본체를 떼어서 여러 차례 컴퓨터 수리점에 맡겨야 했다. 컴퓨터 기사를 집에 불러 수리를 맡길 수도 있지만, 출장비를 주어야 하고 또 오래 기다려야 할 때도 있어서 내가 가지고 가서 수리하는 게 편했다. 처음에는 수리해 온 컴퓨터에 다시 케이블을 연결할 때는 전원 케이블, 인터넷 선, 그리고 모니터, 키보드, 프린터, 스피커 등 많은 선 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도 여러 번 했더니 이력이 생겨 눈감고도 할 수가 있을 정도로 숙달이 되었다.   그러다가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데 또 갑자기 커서가 꼼짝을 않는다. 강제로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켰더니 한참 쓴 글이 다 날아가 버렸다. 다시 작업하다가 한 5분쯤 후에는 또 그런 현상이 반복되더니 결국은 켜지지도 않았다. 또 수리점에 가려고 케이블들을 떼어내는 것을 보던 아내는 이참에 아주 새것으로 바꾸는 게 어떠냐고 했다. 머리가 허연 사람이 컴퓨터를 들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더는 보기 싫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이젠 나도 툭하면 멈춰버리는 컴퓨터가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것을 사기로 했다. 이렇다 보니 컴퓨터를 사려고 인터넷 쇼핑몰에도 들어갈 수 없어서 아들에게 연락했다. 아들은 얼마 후 컴퓨터를 주문했다고 연락을 했다. 마침 추석 때문에 택배가 많아서 연휴가 끝나야 배송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컴퓨터가 없으니 컴퓨터와 함께 시간만큼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매주 영어 공부를 하고 있기에 회원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아야 하는 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실에 컴퓨터를 좀 사용할 수 없겠느냐고 물으니 곤란하다고 한다. 읍사무소에 물어도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는 없다고 한다. 도서관에 연락해보니 컴퓨터를 이용하는 방은 있지만, 코로나19로 도서관 전체가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성당 교우에게 컴퓨터 좀 쓰자고 전화로 부탁하고 방문을 했다. 메일을 열어보니 며칠 동안 벌써 100여 통이 들어와 있었다. 우선 회원들에게 자료를 발송해주고 나서 문서를 열어보았으나 열리지 않았다. 해당 문서를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궁리 끝에 복지관에라도 가서 이메일도 보내고 내가 맡은 한 페이지라도 번역작업을 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안면이 있는 사회복지사에게 연락했더니 복지관에 와서 컴퓨터를 사용하라고 허락을 해주었다.   차로 30분을 달려 복지관에 갔더니 예전에는 그렇게 비좁던 주차장이 대부분 비어있어 적막감마저 들었다. 강의를 듣던 인문학반 컴퓨터에서 회원들에게 메일을 발송하고 나서 내가 공부할 자료를 열었는데 문제는 프린터가 없었다. 혹시나 하고 가지고 간 USB에 문서를 저장한 후 사회복지사에게 인쇄를 부탁했다. 급한 대로 내가 발표할 두 페이지를 번역하여 프린트하고 나니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렇게 일 처리를 하고 보니 컴퓨터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마침 프랑스오픈 테니스대회를 중계하고 있어서 결승이 끝날 때까지 열흘간은 TV를 보느라 거의 온종일 컴퓨터 없이도 무료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여러 시간 TV를 혼자서 차지하지 못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노래를 좋아하지도 않던 아내가 가수 김호중의 열성 팬이 되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는 데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 주문했던 컴퓨터가 도착해서 아들이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있다며 전화를 했다. 다음날 내 서재에는 새 컴퓨터가 놓였다. 이제 컴퓨터에서 문제가 발생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분도 상쾌해졌다. 우선 쌓여있는 200여 통의 이메일을 정리하고 난 후 다시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이제 컴퓨터는 생활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되어버렸다. 이메일 주고받기, 인터넷 쇼핑몰 이용, 인터넷 뱅킹, 인터넷 서핑 등 컴퓨터의 용도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 이처럼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만큼 더 편리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시니어들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지식을 갖춤으로써 더욱더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0-10-20

실시간 나의인생 기사

  •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펼치는 제2의 인생 향연
      글을 쓰며 커피를 볶고 차를 파는 카페를 운영하며 노년을 음미한다.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남평리에 들어서면 멀리에서부터 반갑게 길손을 맞이하는 목조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의 주인장 안영훈씨는 서울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사람이다. 안씨는 이곳에서 글을 쓰며 커피를 볶고 차를 파는 카페(들꽃 향기)를 운영하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삶을 시작한 셈이다. 그토록 갈망하던 삶을 시작했으니 삶이 곧 글이 된다. 들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카페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울림, 이 모든 것이 향기이고 글이 되는 안씨의 하루하루는 산골짜기에 새겨지는 시가 되기도 하고 편지가 되기도 한다.   ▲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에 들어선 목조건물의 ‘들꽃향기’ 카페     순박한 사람을 만나 허물없이 마음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다면 정선 아라리가 알알이 스며있는 남평리 ‘들꽃 향기’로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 아래로는 임계천과 오대천이 유유히 흐르고 아라리를 노래하는 듯 서 있는 푸른 소나무들로 가득한 산들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들꽃 향기’에 들어서면 어떤 마음의 상처도 치유될 것 같다. 이곳에서 그윽한 차 한 잔을 앞에 놓으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봄눈 녹듯 자취를 감출 것 같다.   무작정 어디론가 길을 나선 사람이 찾는다면 더욱더 어울릴 것 같은 ‘들꽃 향기’의 주인장은 오늘도 그리움으로 깊이 우려낸 사랑의 향기를 품은 차 한 잔으로 길손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안씨는 이곳에서 산골음악회도 연다. 여기에서 나온 모든 수익금은 어려운 이웃에게 건네진다. 앞으로는 더욱더 다양한 문화의 향연을 펼치며 많은 사람의 가슴에 들꽃 향기처럼 기억되고 싶어 한다.   ▲ 안영훈씨는 카페(들꽃 향기)에서 다양한 문화의 향연을 펼치며 많은 사람의 가슴에 들꽃 향기처럼 기억되고 싶어 한다.     안씨는 지금까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몰입했다면, 이제부터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고 싶다고 한다. 그의 넉넉한 미소가 봄이 가져다주는 희망처럼 어느새 길손의 마음에 푸름을 물들인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펼치는 제2의 인생 향연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올봄 남평리로 발걸음을 옮겨보면 좋을 것이다.   정선 이주형 시민기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1-11
  • 장례로 고인과 가족을 섬기는 “장례지도사협의회봉사단”
    독거노인들, 무연고자들, 기초생활수급자들이 사망한 경우에는 최소한의 장례마저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이런 문제를 자신들의 일처럼 해결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 사단법인 장례지도사협의회봉사단(단장 강봉희)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장례기술과 경험을 무료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고 있다. 사진제공 - 대구 현대공원 천상병 시인은 귀천(歸天)이라는 시를 통하여, 이 땅에서의 삶과 이별하는 생(生)의 마감을 이렇게 노래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 하리라......”사람들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죽음을 면제받을 수는 없기에 언젠가는 서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어져야 한다. 산자와 죽은 자의 이별도 극한 아픔이지만, 장례에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큰 문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독거노인들, 무연고자들, 기초생활수급자들이 사망한 경우에는 최소한의 장례마저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이런 문제를 자신들의 일처럼 해결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활동하는 단체가 사단법인 장례지도사협의회봉사단(단장 강봉희)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장례기술과 경험을 무료로 베풀어 주고 있다. “장례지도사협의회봉사단”은 24시간 상담이 가능하다. 장례지도를 바라는 어려운분들 위해 장례식장대여료, 수의, 관, 염수수료, 시신운구차량, 화장, 납골당안치 등의 모든 것을 이 법인에서 부담하여 진행한다.2009년 11월 설립된 이 법인은 2010년 기획재정부로부터 기부금단체로 지정받았다. 현재까지 150여건의 장례절차를 봉사하여왔다. 이들의 봉사도 훌륭하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기 위해서는 많은 후원의 손길과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 사단법인 장례지도사협의회봉사단 강봉희 단장 장례 일을 봉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거나 보람 있는 일이 있으시다면 말씀 해주시죠?보람보다는 성취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장례 일의 성격상 일반인이 선뜻 다가서지 않는 일입니다. 간혹 홀로 사시던 분이 돌아가신지 10여일이 지나 발견될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악취가 심해서 유가족도 다가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장례를 다 마치고, 서류정리까지 도와주고 나서 느끼는 성취감이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어떻게 장례 봉사 일을 하게 되었나요? 15여 년 전에 암에 걸려 거의 죽었다고 할 정도였으나 꾸준한 항암치료로 차츰 회복 되었습니다. 그때 병상에서 문득 이 병이 다 나으면 자식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연 어떤 일이 좋을까 하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병원에서 사망하는 분들을 많이 보면서 ‘장례지도’라는 일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관련공부를 하고 ‘장례지도사자격증’을 취득하고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서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동참하는 분들이 하나 둘씩 모여 지금의 법인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 김범일 대구 시장과 장례지도사협의회 단원들. 사진제공 - 장례지도사협의회봉사단 그럼 가장 힘들었던 일은 어떤 것인가요?처음에 이 일을 하겠다고 하였을 때, 제 아내(57·이인숙)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다른 봉사도 많은데 왜 하필 장례 일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봉사단 사무실에 나와 전화도 받아 주고 찾아오는 손님도 대접하는 등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힘든 것이 있다면, 아무래도 금전적으로 힘들지요. 시신 한 구당 대략 150만 원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그 비용을 전적으로 저희 봉사단이 전액 부담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합니다. 봉사를 핑계로 장례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등 온갖 구설수도 많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희들은 시신수습에서부터 관, 염, 장례차량, 화장, 납골당 안치, 마지막 서류정리까지 일체의 비용을 받지 않고 무료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바라는 것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더 열심히 봉사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후원하시는 분들이 차츰 늘어났으면 합니다. 시신운구차량이 꼭 필요합니다. 장례 때마다 시신운구차량을 대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도 많이 듭니다. 비용보다도 대여할 차량이 전혀 없어서 애를 태울 때도 있습니다. 하루 속히 시신운구차량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장례지도사협의회봉사단상담전화 : 053-422-7453웹사이트 : www.jang-re.co.kr대구 차재만 기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1-10
  • 와상장애를 넘어 경제를 살리는 사람
      누워있어야만 하는 와상 환자가 어촌계장을 맡아 양식장을 15배나 늘렸다   주인공은 태안군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문광순(69·남) 씨이다. 문 씨는 요양 1등급의 와상(臥床) 환자로 하루 4시간씩 방문요양서비스를 받고 있는 중환자이다. 충청남도 태안군 방갈리에서 문 씨는 숙박시설을 운영한다. 이곳이 문 씨가 사는 집이기도 하다. 학암포 해수욕장이 내다보이는 문 씨의 방에는 감사패, 공로패, 기념패들로 꽉 차있다.   문 씨는 1987년 이장이 되었고, 1990년에는 재추대되어 마을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며 많은 기대를 모으며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달렸던 문 씨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다. 문 씨와 마을 주민 모두에게도 커다란 슬픔이고 불운이었다.   ▲ 문광순 2006~2013 학암포 어촌계장     사고 후 10여 년 동안 그는 죽을 궁리만 해야 하는 불행한 상태였다. 그러나 머리 외에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는 문 씨에게는 모든 것이 불가능이었다. 치료에 많은 돈을 썼지만 나아지지는 않았다. 마음은 썩고 정신은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마음을 고쳐먹어 봤지만 꼼짝달싹할 수 없는 와상 환자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는 것 외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고를 당한 지 10년째 되던 2002년 마을의 어촌계에 위기가 닥쳤다. 어장도 5ha밖에 안 되고 계속된 실패로 빚은 늘어만 갔다. 그때 주민들이 문 씨에게 찾아와 하소연하면서 의논을 했다.    ▲ 학암포 어촌계 위판장     처음에 문 씨는 자신은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그저 듣기만 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주민들의 고민 속으로 빠져들었다.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런저런 대안을 제시했는데 마을주민들은 문 씨에게 어촌계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문 씨는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움직일 수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그의 아이디어와 인격이 중요하다고 문 씨를 설득했다. 문 씨는 몇 달을 고민한 끝에 어촌계 임원들이 손발이 되겠다는 다짐을 받고 어촌계장직을 수락했다. 모든 일을 생각과 말로만 해야 했다. 누워서 수많은 청사진을 그렸다. 그러다가 착상이 떠오르면, 그것을 진행하게 하며 하나하나 꼼꼼하게 점검해 나갔다.   ▲ 학암포 공동판매장     여기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은 그의 계획에 따라 적극적으로 사업을 진행했다. 친구였던 전임 군수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다. 이렇게 모두의 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여 빚도 청산하고 어장은 73ha까지 늘렸다. 오늘도 어촌계가 보유한 위판장, 공동판매장. 어장관리 선박은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문 씨는 2006년부터 2013년도까지 8년 동안이나 어촌계장직을 수행했다. 건강한 사람도 하기 힘든 일을 문 씨는 누워서 해냈던 것이다. 자기 한 몸도 가눌 수 없는 형편의 사람이 마을의 번영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야말로 누워서 경제를 살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문 씨는 “내가 공을 세운 것이 아니라, 어촌계가 나를 살렸다”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그의 머릿속에는 학암포 마을과 어촌계로 가득 차있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환자용 리프트 차량만 있으면 휠체어에 의지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여러 현안을 풀어가고 싶다”고 한다.   ▲ 학암포 선착장     현재 어촌계의 숙원사업인 선착장 이전 사업이 진행 중이다. 썰물 때가 되면 낮은 수심으로 선착장에 큰 배를 정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지금까지는 어장에서 수확한 해삼, 전복 등의 수산물을 멀리 소원면 모항항까지 싣고 가서 판매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과 경제적 손실이 매우 컸다. 현재 선착장 이전공사가 승인되어 착공을 기다리고 있다.   문 씨의 얼굴에서는 장애가 드리운 그늘은 찾아볼 수 없다. 누워만 있어야 하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선물하고 있다. 그가 하는 모습에서 마을주민들과 어촌계는 엄청난 용기를 얻었다. 저런 처지의 문 씨도 마을을 위해서 일하는데 우리가 낙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으로 모두가 일어나 힘을 모았던 것이다. 이것은 작은 어촌 마을 학암포의 이야기를 넘어, 대한민국의 희망 이야기고, 지구촌 모두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서산 안성호 기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6-01-1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