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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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NS 접속 장애로 겪었던 어려움과 깨달음
    [시니어투데이] 나는 요즘도 매주 월요일 밤에는 1시간씩 동호인끼리 영어 번역 공부를 하고 있다. 전화를 이용하다가 얼마 전부터 화상회의 앱 ‘줌(Zoom)’을 통해서 화상으로 서로 얼굴을 보며 하고 있었다. 그런데 3주 전부터 줌(Zoom)에 연결이 안 되어 나만 참여하지 못하고 있어 속상해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아무런 접속 장애 없이 잘 사용했는데 웬일일까? 그런데 연결만 하려고 하면 내 휴대폰의 와이파이 신호가 사라지면서 연결이 안 되었다. 공유기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도, 휴대폰을 껐다가 다시 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내 접속을 기다리는 동료들에게 나를 기다리지 말고 공부를 시작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혼자서 아무리 애써보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결국은 포기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각종 해결 방법들을 시도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일주일 후에 휴대폰에 와이파이 신호 세기가 강하게 표시되기에 다시 연결해 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알 수 없는 장애로 연결이 안 된다”는 메시지만 뜰뿐 접속이 안 됐다. 그날도 나는 허탕을 쳤다. 몇 시간을 씨름하여 교재를 다 번역해 놓고 공부 시간만 기다렸는데 접속이 안 되니 속이 많이 상했다.   이 방면에 능숙한 지인에게 요청해서 시도를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아내의 휴대폰으로 하면 접속이 잘 되었다. 전화기 때문인 것 같아 A/S 센터에 가보았지만, 휴대폰의 문제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A/S 센터에서 공유기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통신사에 고장 신고를 하여 온라인으로 점검을 해보아도 정상이라고 했다. AS기사가 방문을 해서 전파 측정기로 검사하더니 신호가 잘 잡히니 공유기는 정상이라고 했다.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인터넷에서 “Zoom 연결”, “와이파이 끊기는 문제”를 몇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검색했다. 어디엔가 전화기의 와이파이 문제를 해결할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마지막으로 휴대폰에서 “네트워크 설정 초기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지시한 대로 따라 해서 초기화를 시키고 사뭇 긴장된 마음으로 연결을 시도했다. 놀랍게도 연결이 되었다. 2주 동안 못 보았던 동호회 회원들의 얼굴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이제는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 줌(Zoom)으로 한창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데 휴대폰에 “데이터가 다 소진되어 이제부터는 요금이 부과된다”는 메시지가 뜨는 것이 아닌가.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데이터가 모두 소진되어 있었다.   추가 사용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요금이 부과되어 있었다. 그동안 줌(Zoom)을 연결하는데 와이파이가 아닌 휴대폰 데이터를 사용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마지막 방법은 공유기를 바꾸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새로 구입한 공유기에는 안테나가 네 개나 달려있었다. 설명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공유기 밑면에 비밀번호가 있다고 쓰여있다고 했다. 그 번호를 입력했더니 와이파이 기호가 떴다. 이제 다시 접속을 시도했다. 드디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지금도 전에 사용하던 공유기에서는 아내 휴대폰은 되고, 내 것은 왜 안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디지털 기기는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자주 애를 먹이지만, 시니어들에게는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그러더라도 지치지 말고 차근차근 풀어가다가 보면 끝내는 해결할 길이 나오는 것이다. 시니어들의 자산은 풍부한 경험과 그로 인해 축적된 지혜다.   이것이 바로 시니어들의 경쟁력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하지 말고,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이 또한 시니어들의 저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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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21-06-07
  • SNS 사용에서 주의할 점과 대응 지혜
    [시니어투데이] 며칠 전 새로 들어온 이메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도착하는 이메일은 그중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일단 삭제하고 남은 것들을 시간 나는 대로 읽어본다.   그중에 한 SNS에 ‘친구 요청’이 있다는 메일이 와있었다. 그 SNS에서 보내주는 이메일 가운데 모르는 사람에게서 오는 요청이 많아 보통은 삭제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Jennifer라는 사람으로부터 요청이 왔다. 외국인이 요청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경우라서 열어 보았다. 나의 SNS 계정에 들어와 내가 쓴 글들에 ‘좋아요’ 표시를 여러 번 해 놓았다.   계정에 들어가서 둘러보니 귀엽게 생긴 아가씨다. 군복을 입고 동료들과 찍은 사진도 여러 장 보였는데 아마 여군인 모양이다. 그런데 며칠 후 메시지가 와있어 열어보니 ‘제발 좀 친구로 추가해주세요’라고 한글로 쓰여 있었다. 친구 요청을 거절한 경우가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다시 요청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까짓것 별일이야 생기겠나 싶어 ‘친구 요청’을 수락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이메일을 열어보니 내 SNS 계정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자기는 시리아에 있는 미국 군인인데 반갑다고 인사를 보낸 것이었다. 나도 반갑다고 간단하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이메일을 열었는데 별도의 메신저로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열어보니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자기는 한국계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7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지만, 씩씩하게 자라서 군인이 되어 지금 시리아에서 정보통신 업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나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커다란 시련을 겪어서 힘들었겠지만 씩씩한 군인이 되었다니 장하다고 대답해 주었다.   나는 시리아라면 한밤중 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몇 시쯤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새벽 2시라고 했다. 그래서 밤이 늦었으니 다음에 얘기하고 어서 가서 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야간 근무 중이라 괜찮다고 했다. 전화로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묻는다. 가르쳐 주었다.   잠시 후에 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연결하는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통화는 안 되었다. 잠시 후에 메시지가 왔다. 군사시설이라서 보안 때문에 통화가 어렵다고 하면서 ○○톡을 하느냐고 물었다. 물론이라고 했더니 ○○톡 아이디를 묻는 것이었다. ○○톡은 아이디가 없이 그냥 이름으로 등록이 되었는데 아이디라니? 그래서 아이디는 없다고 하니 잠시 후에 자기 아이디를 알려주며 친구추가를 부탁했다.   우여곡절 끝에 ○○톡 연결이 되었다. ○○톡으로 “얼굴도 보고 목소리도 듣고 싶었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통화할 수 없습니다"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점차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SNS 프로필을 보고 가장 믿을만한 사람으로 당신을 선택했다. 자기는 자살폭탄 공격이 심한 이곳에서 군에서 퇴직하여 민간인으로 살고 싶다. 얼마 후 한국으로 돌아가 사촌들과 조부모님도 찾아 정착하여 살고 싶다. 자기를 좀 도와 달라”는 요지의 부탁이었다. 나는 시골에 사는 노인이라서 도움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갈수록 다음과 같은 놀라운 요지의 말을 늘어놓는다. 수색 중에 큰돈을 발견했다. 아마 저항군들의 군자금인 것 같다. 아무도 모르게 이것을 네 명이 나누기로 했는데 자기 몫은 5백만 달러쯤 된다. 달러가 가득 들어 있는 철제상자와 전투 현장의 사진들도 보냈다.   “한국 정착자금으로 사용할 이 돈 상자를 화물로 보낼 터이니 보관을 부탁한다. 자기는 물건이 도착한 2주 후에 한국에 입국하겠다. 액수의 30%를 수고비로 드리겠다. 주소를 알려 달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돈도 싫고 조용하게 살고 싶은 노인이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을 찾아봐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제발 도와 달라. 당신이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매달린다.   나는 아침에 아내와 공원에서 조깅한 후 시장에 들려오기로 한 터라 더는 붙들고 있을 수도 없어 그냥 ○○톡을 끝내고 외출 준비를 했다.   어린이날 손자들을 데리고 아들 내외가 왔을 때 그런 해프닝이 있었다고 얘기를 하며 ○○톡을 보여주었다. 아들은 이런 사건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가끔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며 낯선 메시지는 무시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말했다.   SNS에 프로필을 노출하다가 보니, 편리함도 있지만, 범죄에 악용될 소지도 없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과도한 사생활이나 개인정보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SNS가 편리하고 관계를 통해 존재의 힘을 과시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폐해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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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과학도를 꿈꾸며 2021년 대학 생활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시니어투데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팬데믹(pandemic)으로 온 세상이 힘들었던 2020년이 저물어가던 즈음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대학에 지원한 외손자의 합격 소식이었다.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외손자가 희망하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기에 무척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외손자는 초등학생 때부터 유난히 과학을 좋아했고, 학교 대표로 출품한 각종 과학 관련 대회에서 자주 입상하여 학교에서도 주목받는 아이였다. 명절 때 외가인 우리 집에 오면 과학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다. 그런데 너무 수준이 높아 공대를 나온 나도 대답하는 데 쩔쩔매기가 일쑤였다.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친구에게 도움을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을 했지만, 자신의 전공 분야 외에는 아는 것이 일반인과 다르지 않으니 이해해 달라고 사양했다.   한번은 가족 모두가 놀라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큰일이 벌어졌던 일도 있었다. 외손자가 중학생 때였는데 엄마, 아빠가 모두 외출하고 없는 시간에 혼자서 주방 식탁 한쪽에 실험도구를 차려놓고 화학실험을 하다가 폭발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로 외손자는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 얘가 입원해 있다는 화상 전문병원에 가보니 얼굴과 손이 온통 붕대로 감겨있어 눈앞이 캄캄했었다. 다행히 몇 달 후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퇴원하여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얘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와서 종이로 만든 우주선을 건네고 갔다. 어느 날 책장에 올려놓은 그 종이 우주선을 보고 소망을 담아 적어 본 시다.   종이 우주선   책장 위에서 발사대기 중인 U-3069호 종이 우주선 언제 창공으로 솟아오를까?   우주과학자가 되겠다는 꽃 같은 우리 외손자 놀러 와 만든 꿈을 기도 속에 키워주었다.   주방 한쪽 너의 작은 실험실에서 들린 폭발음은 먼 훗날 네 종이 우주선이 날아오를 전주곡이었을까.   온통 붕대밖에 보이지 않던 그날 병실에서는 가슴이 내려앉았었는데   이제는 그 꿈 펼칠 나날 그리며 쉼 없이 달려가는 네 모습이 할아버지 마음에서 행복하게 솟아오르고 있구나.   나는 과학도로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될 출발을 앞둔 외손자와 이와 같은 길을 걷게 될 많은 젊은이에게 축복과 함께 기대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과학자는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야 할까.   과학 연구에 대한 과학자의 태도는 인류의 삶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것이다.   교통기관의 발전에 이바지함으로써 인간의 활동 범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인류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생명공학의 발전은 질병과 식량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비로운 힘이 되었다. 이제 인공지능, 로봇 등의 발전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활짝 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과학자들이 인류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인류에 대해 남다르게 따뜻한 감성을 지녀야 한다. 겸손한 마음과 뛰어난 공감력 및 소통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열심히 해서 이룬 성과이고 이루어갈 미래인데 왜 그래야 하는가?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부모와 두뇌 및 신체적 조건 그리고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은 한 개인은 자신과 인류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수한 자질을 지닌 것과 그에 따른 노력으로 얻은 결과는 그 개인의 영광임과 동시에 인류의 공적 자산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의 삶은 그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연구하는 분야의 수많은 선행연구자의 연구 성과와 그를 가르쳐준 많은 스승 그리고 국가적 지원 등 주변의 다양한 도움도 내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과학자들은 남다른 시대적 사명을 지녀야 하고, 그만큼 보람도 크다고 본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고 그에 따른 사명감과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남다른 자질을 지닌 사람은 그만큼 영광도 크기에 그에 따른 사명감을 보람으로 여기는 넓은 마음과 안목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수한 자질을 바탕으로 뜨거운 열정과 큰 노력으로 이루어낸 대학 입시 결과로 과학도로 출발할 시점을 앞둔 모두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자신의 발전을 통해 인류의 행복에도 이바지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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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21-01-11
  • 차량용 빗물받이 교체, 직접 해결하다
    [시니어투데이] 언제부터인가 내 차의 조수석 뒤쪽 좌석 창문 위에 달려있던 빗물받이가 한쪽이 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눈에 거슬리기는했지만, 중요한 부품도 아니어서 그대로 타고 다닌 지가 1년이 넘은 것 같다. 그러다가 얼마 전 좁은 길을 지나는데 물건을 내리려고 주차하고 있던 화물차 기사가 갑자기 뒷문을 열어젖히는 바람에 내 차의 조수석 백미러가 떨어져 나갔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아내는 놀라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려서 보니 앞바퀴 윗부분과 그쪽 문에도 흠집이 생겨있었다. 물론, 화물차 기사가 100% 자신의 과실이라고 인정하여 그쪽 보험사의 부담으로 수리를 다 마쳤다.   수리를 마치고 며칠 후에 보니 조수석 창문에 부착되어있던 빗물받이도 일부가 깨져 있는 것이었다. 그때 사고로 깨진 것이 확실하지만, 뒤늦게 청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를 알고 나니 눈에 거슬려 과감하게 새것으로 교환하기로 했다.   집 부근의 카센터에 가서 교환을 부탁했더니 일을 맡지 않으려 했다. 차량용 부품점에 가면 부품을 살 수 있으니 거기에서 사서 붙이라는 것이었다. 수리비를 많이 받을 수도 없는 하찮은 일에 매달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센터에서 알려준 곳으로 가서 아무리 찾아봐도 차량용 부품점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순간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온라인 쇼핑몰에서 차량용 빗물받이를 검색하니 차종별로 많은 제품이 올라와 있었다. 거기에서 내 차에 알맞은 빗물받이를 선택하여 주문했더니 며칠 후 물품이 도착했다.   택배로 도착한 빗물받이를 가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파손된 것을 떼어내기만 하면 나도 쉽게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단단히 붙어있어 조각이 떨어져 나가도 일부는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수리를 의뢰하러 카센터로 갈까 하다가 좀 더 해 보기로 하고, 혹시 몰라 비상용으로 글로브 박스(glove box)에 넣어두었던 드라이버를 몇 년 만에 꺼내 들었다. 오늘따라 기온도 낮았고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힘을 내서 드라이버를 틈새로 끼워 넣는 등 한참 동안을 씨름해서 겨우 모두 떼어낼 수 있었다.         새로 산 빗물받이에는 양면 접착테이프가 붙어있었고, 그 표면에서 보호용으로 부착된 종이를 떼어낸 다음 적당한 위치에 단단히 붙였다. 이렇게 하면 될 것을 그동안 깨어진 빗물받이를 달고 다녔던 것이 안타까웠다.   요즘은 차량용 이외에도 소비자가 손쉽게 수리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 용품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시도를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쉽게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불편함을 처리하고 발전적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용기와 도전 의식이 필요하다.   특히, 시니어들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보다 체력과 역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시니어들에게는 일평생 쌓아온 경험과 지혜가 있지 않은가.   장비를 쓰는 것이나 조작과 사용이 편리하게 만들어진 용품들이라면 이를 하는 데에서는 힘보다는 지혜가 더 가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니어의 강점이고 더욱더 힘차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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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20-11-30
  • 컴퓨터 없는 생활에서 느낀 소회
    [시니어투데이] 내가 사용하고 있던 컴퓨터가 자주 말썽을 부린지가 여러 달 되었다. 아들이 쓰던 것을 가져와 오래 써왔다. 그동안 바이러스 때문에 포맷도 여러 번 했다. 얼마 전부터는 커서가 꼼짝하지 않기도 하고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정상적으로 컴퓨터를 끄지도 켜지도 못해 강제로 전원을 꺼야 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본체를 떼어서 여러 차례 컴퓨터 수리점에 맡겨야 했다. 컴퓨터 기사를 집에 불러 수리를 맡길 수도 있지만, 출장비를 주어야 하고 또 오래 기다려야 할 때도 있어서 내가 가지고 가서 수리하는 게 편했다. 처음에는 수리해 온 컴퓨터에 다시 케이블을 연결할 때는 전원 케이블, 인터넷 선, 그리고 모니터, 키보드, 프린터, 스피커 등 많은 선 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도 여러 번 했더니 이력이 생겨 눈감고도 할 수가 있을 정도로 숙달이 되었다.   그러다가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데 또 갑자기 커서가 꼼짝을 않는다. 강제로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켰더니 한참 쓴 글이 다 날아가 버렸다. 다시 작업하다가 한 5분쯤 후에는 또 그런 현상이 반복되더니 결국은 켜지지도 않았다. 또 수리점에 가려고 케이블들을 떼어내는 것을 보던 아내는 이참에 아주 새것으로 바꾸는 게 어떠냐고 했다. 머리가 허연 사람이 컴퓨터를 들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더는 보기 싫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이젠 나도 툭하면 멈춰버리는 컴퓨터가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것을 사기로 했다. 이렇다 보니 컴퓨터를 사려고 인터넷 쇼핑몰에도 들어갈 수 없어서 아들에게 연락했다. 아들은 얼마 후 컴퓨터를 주문했다고 연락을 했다. 마침 추석 때문에 택배가 많아서 연휴가 끝나야 배송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컴퓨터가 없으니 컴퓨터와 함께 시간만큼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매주 영어 공부를 하고 있기에 회원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아야 하는 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실에 컴퓨터를 좀 사용할 수 없겠느냐고 물으니 곤란하다고 한다. 읍사무소에 물어도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는 없다고 한다. 도서관에 연락해보니 컴퓨터를 이용하는 방은 있지만, 코로나19로 도서관 전체가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성당 교우에게 컴퓨터 좀 쓰자고 전화로 부탁하고 방문을 했다. 메일을 열어보니 며칠 동안 벌써 100여 통이 들어와 있었다. 우선 회원들에게 자료를 발송해주고 나서 문서를 열어보았으나 열리지 않았다. 해당 문서를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궁리 끝에 복지관에라도 가서 이메일도 보내고 내가 맡은 한 페이지라도 번역작업을 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안면이 있는 사회복지사에게 연락했더니 복지관에 와서 컴퓨터를 사용하라고 허락을 해주었다.   차로 30분을 달려 복지관에 갔더니 예전에는 그렇게 비좁던 주차장이 대부분 비어있어 적막감마저 들었다. 강의를 듣던 인문학반 컴퓨터에서 회원들에게 메일을 발송하고 나서 내가 공부할 자료를 열었는데 문제는 프린터가 없었다. 혹시나 하고 가지고 간 USB에 문서를 저장한 후 사회복지사에게 인쇄를 부탁했다. 급한 대로 내가 발표할 두 페이지를 번역하여 프린트하고 나니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렇게 일 처리를 하고 보니 컴퓨터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마침 프랑스오픈 테니스대회를 중계하고 있어서 결승이 끝날 때까지 열흘간은 TV를 보느라 거의 온종일 컴퓨터 없이도 무료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여러 시간 TV를 혼자서 차지하지 못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노래를 좋아하지도 않던 아내가 가수 김호중의 열성 팬이 되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는 데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 주문했던 컴퓨터가 도착해서 아들이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있다며 전화를 했다. 다음날 내 서재에는 새 컴퓨터가 놓였다. 이제 컴퓨터에서 문제가 발생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분도 상쾌해졌다. 우선 쌓여있는 200여 통의 이메일을 정리하고 난 후 다시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이제 컴퓨터는 생활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되어버렸다. 이메일 주고받기, 인터넷 쇼핑몰 이용, 인터넷 뱅킹, 인터넷 서핑 등 컴퓨터의 용도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 이처럼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만큼 더 편리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시니어들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지식을 갖춤으로써 더욱더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한다.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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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순에 맞은 새내기 대학생
    3년 전 나는 지인을 따라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을 찾아왔다. 맨 먼저 찾은 곳은 탁구장이었다. 그곳의 첫인상은 열정과 활력이었다. 전혀 탁구를 할 줄 몰랐던 나였지만, 이 광경을 보면서 매력에 빠졌다. 나도 곧 이들과 동화되었고, 이젠 어느 정도 탁구를 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뿔싸, 잘 나가다 사고를 만났다. 탁구장에서 넘어지는 일을 당해 팔의 골절과 탈골 그리고 갈비뼈 골절까지 일어났다. 병원에 입원한 나는 우울하고 짜증스런 나날을 보냈다.   2017년 1월 10일 퇴원을 하면서 어떻게 살까를 고민했다. 그러나 후퇴보다는 전진이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내어 퇴원한 다음 날 복지관을 찾았다. 사무실에서 프로그램을 찾아보며 문의하는 가운데 문득 예전에 지인이 인문학반 수강을 권유했던 생각이 났다. 인문학반 교수님의 명강의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던 일이 머리를 스쳤다. 무엇에 이끌리듯이 망설임 없이 곧바로 인문학반에 등록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강의실로 들어섰다. 마침 2년 동안 키보드를 배웠던 강의실이었기에 심적으로 도움이 되긴 했다. 긴장감도 잠깐이었고 여기저기에서 아는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금세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인문학반의 다정다감한 분위기가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가운데 교수님의 명강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나도 모르게 강의 속으로 빨려들어 울고 웃으며 두 시간을 보냈다. 상상 이상의 기쁨과 행복이 나를 감싸며 그동안의 모든 상처를 말끔하게 치유하는 것 같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가 콧날이 시큰하게 했다. 배움과 깨달음이 주는 신비롭고 행복한 감흥이었다. 교수님은 인문학의 토대는 삶이고 그 방법은 이해와 해석이라고 하셨다. 엄청난 공감이 한순간에 밀려들며 그동안 막혔던 배움과 깨달음을 순식간에 뚫어 주는 것 같은 통쾌함을 맛보게 했다.   사실 나는 인문학에 대해 큰 거리감을 느꼈었던 터라 두렵게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지나친 기우였다. 인문학이야말로 우리의 삶이고 내가 바로 인문학의 주체이고 대상인 것이다.   교수님은 우리의 삶이 담긴 대중가요도 들려주었고, 시도 해석하고 인문학 동우들이 쓴 글도 읽어주며 인문학을 풀어나가셨다. 그야말로 오십 년 만에 다시 새내기 대학생이 된 기분이 나를 행복하게 휘감고 돌았다.   그 시절에는 철없이 어울려 돌아다녔는데, 지금은 그때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혁신하여 보상한다는 마음이 들어서 가슴이 뿌듯했다. 얼굴에 주름이 자리 잡은 칠순의 나이에 나는 두 번째 대학생이 되었다.   교수님께서 시니어들의 삶은 보물과 같다고 하시는 말씀이 공감되었다. 이런 공감 속에 밀려오는 깨달음과 기쁨이 나를 다시 청춘으로 회복시켜주었다. “이런 것이 바로 인문학이구나!” 인문학적 상상력이 내 마음에서 살아 움직이며, 이 황혼에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의 여행을 떠나게 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실하게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가슴으로 스며들어 아름답게 물들었다.   교수님께서는 이런 기쁨에 빠진 나를 향해 다가오시며 “한 송이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라고 말씀을 건네셨다. 정말로 그랬다. 내 마음에서 싹이 튼 행복의 씨앗이 얼굴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던 것이다. 교수님의 강의와 위로의 말씀이 영화 <러브 스토리>의 배경음악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명화를 감상하는 듯, 명곡을 듣는 듯, 이 강의를 들으며 이곳,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행복에 온몸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 아직은 팔도 시원치 않아 글씨도 예쁘지 않고, 비록 글솜씨도 좋지는 않지만, 이것이 인문학을 배우며 얻게 된 기쁨과 감동을 억누르게 할 수는 없기에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 반에서 함께 인문학 강의를 듣고 계시는 동우 여러분! 저와 함께 모두 새내기 대학생의 마음으로 멋지게 사십시다. 여러분 모두의 행복과 건강을 기도합니다. 여러분, 모두 화이팅! 나제숙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7-03-23
  • 고독은 아픔이 아니라 역전의 기회이다
    어둠을 물리치고 온 하늘이 불타오르는 하늘은 인간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어둠이 지나가고 찾아오는 찬란한 빛은 마치 캄캄한 무덤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것 같은 감격을 맛보게 한다.   어둠은 쉼과 긴장의 쌍곡선이다. 캄캄한 밤이 지나고 떠오르는 밝은 아침 해는 가장 가깝고도 먼 만남과 헤어짐이기 때문이다. 어둠이 없으면 쉴 수 없다. 그래서 어둠은 나쁜 것만이 아니다. 곧 쉼이고 준비의 기간이며 새날을 만드는 아름다운 모태이다.   사람마다 각가지의 어둠의 시간을 지낸다. 고난의 밤은 어둠과 한숨과 눈물로 지내야 하는 아픔의 시간이다. 혼자만의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는 어둠에 갇혀 일어날 힘조차 없을 때도 있다. 가난이라는 어둠, 질병이라는 어둠,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배신이라는 어둠, 이혼이라는 어둠, 자녀의 문제로 발생하는 어둠 등 다양하다.   어둠 속에서 낙심하던 시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밝게 떠오르는 태양이다. 이것은 희망이다. 어둠이 없으면 별이 보이지 않는다. 캄캄한 밤하늘에서만 반짝이는 별이 보인다. 모든 것은 어둠에서 잉태된다. 씨앗도 흙 속에서 싹을 틔우지 않던가?   그래서 어둠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어둠은 영원하지 않다. 어둠은 어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침을 낳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아침의 참된 기쁨을 아는 사람은 어둠의 시간을 원망하지 않는다. 아침이 밝아왔다고 해도 언제나 형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비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이것도 인생의 묘미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내느냐에 따라 삶은 그만큼 아름답게 변화된다. 절망에서 희망을 꿈꾸며 싹을 틔워야 밝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고독의 시간 속에서 공존의 아름다움은 싹을 틔운다. 고독은 미움, 다툼, 시기, 질투를 승화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시간은 무엇 때문에 울어야 했고, 가슴 아파했으며, 왜 낙심하고 절망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이때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추스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흐르는 고요한 소리를 듣는 시간이다. 겨울 역시 고난의 시간이 아니라 봄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인생의 겨울이 지나고 있다면 그것은 봄을 맞이할 준비이기에 가슴 설레는 꿈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인생에서 원치 않는 안개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자. 희망의 햇빛이 비치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와 행복을 선물한다. 긍정의 마음은 나만을 위한 이기주의를 버릴 때 가을 하늘처럼 참된 기쁨과 행복으로 드넓어진다.   성경에서는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한다. 저녁과 아침은 분리가 아니라 하나이다. 삶의 터전에서 이것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 진정한 행복을 꽃피울 수 있게 된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거대한 날개로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장 높이 나는 앨버트로스의 비상도 시련이 만들어낸 거대한 아름다움이다.   그대여! 우리 함께 어둠을 통해 거대한 울림과 비상을 창출하며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보자.   유정애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7-03-23
  • 나의 봉담 정착기
    나는 서울 잠실에서 40여 년 동안 살았었다.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그때 잠실은 한강 변 모래벌판이었다. 여기에 대단지 아파트를 지은 것이다. 이렇다 보니 아파트 후문 옆이 시내버스 종점일 정도였다.   종점은 곧 차고지를 의미하니, 얼마나 한적했을지 짐작될 것이다. 도심인 종로나 을지로에서 밤늦게 택시를 세우고 잠실로 가자고 하면 기사는 번번이 핑계를 대고 승차거부를 하는 일이 많았다.   그 먼 곳에 갔다가 승객이 없어 빈 차로 올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주변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고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어 서울에서도 번잡하고 공기가 좋지 않기로 유명한 동네가 되고 말았다.   나는 결혼 후 장항제련소에서 근무하다가 4년쯤 되었을 때 말레이시아에 취업할 기회가 생겨 가족과 함께 그곳에서 5년을 살았었다. 귀국하여 내가 처음으로 집을 마련한 곳이 잠실이었다.   내가 장만한 집은 4단지 아파트였는데 연탄보일러로 난방하는 17평형이었다. 퇴근하고 오면 아내는 보일러 아궁이에서 부서진 연탄재 부스러기를 긁어내느라 땀과 눈물이 범벅인 얼굴로 나를 맞이할 때가 많았다.   여동생은 우리 집 부근 2단지 19평형에 살았는데 그 아파트는 석유로 난방했다. 아내는 은근히 그곳에 사는 여동생 집을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매제는 은행원이었다. 그러니 이재에도 밝았을 것이고 그런 덕택에 연탄도 때지 않는 쾌적한 아파트에 사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집사람을 위해서는 어서 빨리 연탄에서 해방되는 게 급선무였다. 당시에는 아파트값이 계속 오를 때여서 모두 은행대출을 받아 집을 옮기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재에는 주변머리가 없던 나는 내 손에 현금이 모이지 않으면 집을 옮길 엄두를 내지 못하는 숙맥이었다. 이런 탓에 여러 해 뒤에야 2단지로 옮겨 연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 2, 3, 4단지에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아파트값은 턱없이 뛰기 시작하였다. 내가 살던 2단지 19평형도 당시 재건축 계획이 없던 34평형 5단지 값보다 더 올라서 오히려 수리비를 제하고도 남는 가격이었다.   애들도 대학에 다니는 나이가 되어서 좀 더 넓은 집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2단지 아파트를 팔고 5단지 아파트를 사서 수리를 했다. 오래된 난방 파이프도 교환하고 바닥은 긁히지 않는다는 소재로 깔고 싱크대도 교체하는 대수리를 감행했다.   내가 살던 주공 5단지는 롯데월드 바로 건너편이어서 잠실에서도 제일 번잡한 곳이었다. 어느새 이곳도 재건축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40년 전에 지은 낡은 아파트가 5년 전 살 때보다 5배가 넘는 가격으로 뛰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노후자금도 마련하지 못한 채 퇴직한 주변머리 없는 나를 신께서 가엾이 여기신 것이리라. 이참에 차라리 아파트를 팔고 공기 탁하고 번잡한 잠실을 떠나 애들이 사는 수원 근방으로 집을 옮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부동산에 전세로 집을 내놓았다.   그러면 어디로 갈까? 수원은 서울과 별반 차이 없는 대도시가 되었으니 그 부근 어딘가 좀 더 조용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지도를 들여다보니 봉담이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지만, 순박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성당에 다녀야 하니 우선 인터넷에서 봉담성당을 검색해 보았다. 마침 가까운 곳에 성당도 있었다.   직접 답사도 필요 없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으니 정말로 편리한 세상이다. 일단 한번 가보기로 하고 내비게이션에 봉담성당을 입력하고 차를 몰고 나섰다. 현지에 도착해보니 상가도 있고 아파트도 여러 군데 있어서 이 정도라면 살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서울로 연결되는 고속도로가 바로 옆에 나 있고 수원도 20~30분이면 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통이 편리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성당에서 제일 가까운 아파트를 찾아 부동산에 전세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당장 전세로 나온 것은 없었다. 전세가 나오면 바로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해놓고 잠실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집을 알아보러 봉담 부근 여러 부동산사무소를 방문하며 돌아다녔다.   며칠 후 호매실에서 전세 나온 게 있어 가보았으나 너무 낡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곳을 찾아보고 있는데 봉담에서 전세가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지은 지 10년 정도였는데 비교적 깨끗해서 바로 계약을 했다.   이렇게 하여 2011년에 지금 사는 봉담의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자주 만나던 친구들은 나이가 들수록 아는 사람들 가까이 살아야 하는데 아무 연고도 없는 데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느냐고 만류가 대단했다.   그러나 성당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사람들도 사귀고 새로 입교하는 신자들에게 교리도 가르치다 보니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전세 기간이 끝나는 2년이 되어 아예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기로 마음먹고 서울 아파트를 정리했다. 그리고 살고 있던 아파트 단지에서 위치가 더 나은 아파트를 장만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지금은 복지관에서 합창도 하고 서예도 배우면서 탁구와 당구도 즐기고 있다. 특히 인문학 강의를 듣다 보면 이제 활발한 중년의 시작이라는 교수님 말씀에 새로이 힘이 솟는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강사교육까지 받으라고 하신다. 이렇다 보니 내 인문학적 상상력이 어디까지 발전하게 될지를 생각해 보며 행복에 젖어 든다. 내가 전혀 계획해보지도 못했던 이곳 봉담에서 누리는 나의 두 번째 청춘은 그야말로 소박하고 알찬 나날이다.   이런 내 삶은 어쩌면 모든 인간이 바라는 평범함으로 이루어지는 최상의 가치이고 행복이 아닐까? 내 마음에서는 어느새 깊은 감사가 맑고 싱그러운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다.   아! 이제 나는 이런 은혜를 베푸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 행복을 더욱더 주변과 나누며 풀밭으로 꽃밭으로 바꾸며 살려고 노력한다. 김상태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7-03-23
  • 유자식 상팔자와 함께 누리는 두 번째 청춘
    이제 와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다 행복한 것이었다. 어려웠던 일, 기뻤던 일이며 온갖 일들이 뒤섞인 하나의 묶음이 인생이리라. 그 가운데 유독 자식들에 관한 일은 가장 큰 아픔이자, 최고의 기쁨이 아니던가.   나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수유리에서 신일중학교를 나와 유한공고에 진학했다. 그런데 고2 때 같은 중학교를 나온 동창 녀석과 함께 가출을 해버렸다. 그때의 좌절과 상실감은 말로다 할 수 없다.   그랬던 아들이 돌아왔다. 아비로서 학교에 찾아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학교에 다니도록 조치를 했다. 그러나 아들과 그 친구 녀석은 둘 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았던가? 두 녀석은 고졸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예비고사에도 합격했다. 아들의 친구는 국민대학교에 진학했고 내 큰아들은 교사가 되겠다며 인천교육대학교에 진학했다. 점수보다 조금 하향지원을 한 것 같아서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으나 참으로 기뻤다.   아뿔싸, 대학진학 후 폐렴으로 3개월이나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대구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수리조합에 다니는 아가씨를 만나서 제대한 다음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착한 며느리를 보게 되어서 매우 기뻤다.   아들의 첫 발령은 양평초등학교였다. 학교 관사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아들은 손녀를 안겨주었다. 지금, 큰 손녀는 안산시청에 근무하고, 작은 손녀는 제 아버지 뒤를 이어 교사가 되었다. 큰아들도 이제는 내년이면 환갑이다.   둘째 아들은 동대문상고를 나와서 사업을 했으나 시원치 않았다. 군에서 제대하여 주유도매상으로 취업하여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40세가 되도록 결혼을 안 하여 내 속을 태웠다. 어느 날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한다면 사진을 보여 주었다.   나는 무척 반대했다. 괜한 거부감으로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모른다. 화성시 남양동에서 살고 있는 둘째는 딸 둘을 낳고 화목하게 살고 있다. 둘째 며느리는 결혼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여 상장과 함께 상금을 무려 500만 원이나 받았다. 베트남 대사까지 축하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이제는 다문화 시대가 아닌가? 박요섭 교수님은 늘 ‘너’와 더불어 ‘나’를 강조하신다. 나는 요즘 지난날 며느리와 나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차별하려 했었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반성한다.   만약 그때 박요섭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지금처럼 배우고 깨달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렇게 배우고 깨달으니, 그만큼 행복하고 며느리에게도 더 잘해주게 된다.   박요섭 교수님은 늘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며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합리적 의사소통 능력, 조화, 나눔, 배려, 사랑의 중요성을 쉼 없이 깨우쳐 주신다. 이런 배움과 깨달음으로 복된 나날을 꽃피워가는 나는 참으로 복 받은 인생이다.   내 막내딸은 성암여중․고를 졸업하고 미도파백화점에서 근무하다가 결혼을 해서 1남 1녀를 두었다. 큰 손녀는 경기대학교 4학년이고, 아들은 대학을 다니다가 휴학을 하고 군 복무를 하고 있다.   이것이 모두 내 삶의 결실이 아닌가? 나는 지금 두 번째 청춘을 살고 있다. 이 행복을 더욱더 아름답게 승화하며 가장 빛나는 하루하루를 살려고 한다. 나이에 눌리거나 위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없이 복 되고 아름다운 오늘 하루를 영원한 현재로 누릴 뿐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청춘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 키팅 선생님은 미래라는 욕망에 이끌려가는 제자들을 향해 구원을 부르짖는다. 바로 영원한 현재인, 오늘에 충실함으로써 가장 진실하고 아름다운 내일을 맞이하라고, 그것이 바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다.   우리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 인문학반을 지도하시는 박요섭 교수님도, 우리의 키팅 선생님이고, 이 시대의 키팅 선생님이 아닌가. 인문학반 동우 여러분, 우리 모두 두 번째 청춘을 영원한 현재로 멋지게 꽃피웁시다. 김기원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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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 목련꽃과 함께 피어날 소망의 새봄을 맞이하며
    아직은 겨울이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에 꽃 소식은 남쪽에서나 들려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집 앞에 서 있는 목련 나무가 나지막하게 내게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한 생각에 문을 열고 나무를 자세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벌써 목련의 꽃망울이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는/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그대처럼 순결하게 그대처럼 강인하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 내일을 바라보면서 하늘 보고 웃음 짓고/ 함께 피고 함께 지니 인생의 귀감이로다./ 그대 맑고 향긋한 향기 온 누리 적시네./ 그대처럼 우아하게 그대처럼 향기롭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값있게 살아가리.”   경희대학교의 설립자 조영식 박사가 작곡한 <목련화>라는 노래이다. 구구절절 공감되는 가사이기에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를 일컬어 백의민족이라고 하지 않는가. 유독 흰색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은 그만큼 순수하다는 것이리라. 순수함은 윤리적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생에 대해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고 수많은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나는 윤리를 중심에 두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해석을 함으로써 살아간다.   윤리가 배제된 삶이라면 경제적으로 크게 넉넉해도, 지위가 아무리 높더라도 그것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올봄도 흰 꽃을 피워 우리를 순수하게 회복시키라고 무언의 깨우침을 주게 될 목련꽃의 봉우리를 보고 있다.   그리고 <목련화>의 가사를 음미하며 우리 모두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해 본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바로 이런 것으로 생각한다. 박 교수님은 늘 우리에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의 토대에서 살아야만 최상의 가치를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국부론》의 저자이자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저서 《도덕감정론》에서 ‘공정한 관찰자’를 제시한다. 인류가 축적한 경험을 통해서 모두가 공감해온 것으로 기준을 설정하고 이에 적합한 승인을 할 수 있는 마음속 가상의 판단자를 ‘공정한 관찰자’라고 했다.   나는 이것을 ‘순수’라고 생각해본다. 사랑도 순수해야 한다. 순수라는 것은 윤리의 바탕 아래 인간 본래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본다. 나는 피어날 준비를 하는 목련꽃 봉우리를 보면서 이 봄을 가장 순수하게 살아볼 작정이다.   그래서 어느 해 봄보다 2017년의 새봄을 설렘 속에 맞이하고 있다. 우리 인문학반 동우들에게도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2017년의 새봄이 가장 벅찬 기쁨과 행복을 선물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권영춘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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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 생각을 바꾸면 삶이 행복해진다
    한 해를 보내고 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았다. 어떻게 하면 새롭게 맞이한 이 해를 이전보다 더욱더 잘 살 수가 있을까? 그 방법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방법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속도보다는 방향이다.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고 해도 방향이 잘못되면 오히려 달려간 만큼이 손해가 된다. 그래서 나는 먼저 올 한해를 살아갈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아름답게 달려갈 작정이다.   돌아보니 작년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일 년이었다. 내 생에서 경험하고 쌓아온 모든 지식과 지혜의 가치를 혁신하여 새롭게 열매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결과를 얻었다. 내가 책을 출간하는데 동참하고 나도 저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우리 인문학 동우들과 《시니어들의 인문학 여행》이라는 책을 출간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벅찬 감동과 기쁨을 감출 수 없다. 정말 보람 있는 한 해였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60세를 넘어 70세가 되는 나이에 쉽게 꿈꾸기 어려웠던 일이 아닌가. 열심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온 것이다.   지난날 60세를 맞으며 왠지 모를 우울함 속에 허무함에 시달렸다. 이런 괴로움의 흐름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큰 아픔이 찾아왔다. 나와는 늘 소통하며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던 큰 올케를 찾아온 암은 끝내 나와 올케의 사이를 영영 갈라놓고 말았다. 아픔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하던 동생마저 나를 떠나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나는 삶의 의욕마저 추스를 길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정말로 슬프고 허무했다. 그저 우울한 시간이 연속이었다.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 슬픔에 잠겨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냈다.   그러다가 찾은 곳이 바로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이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준 은혜의 통로였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깨달으며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2년 전과 비교해 현실은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내 생각은 180도로 바뀌었다. 그때는 늙어가는 초라함이 내 마음을 짓눌렀고, 더는 아무것도 추구할 수 없다는 허무함과 우울함에 슬펐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내 삶이 환경에 휘둘리는 대로 이끌려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희망으로 내 삶을 역동적으로 움직여 나가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열심히 하면서 즐겁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스페로 스페라(Spero Spera), 라틴어로 “나도 희망한다. 너도 희망하라”는 말이다. 나는 우리 동우들을 향해 “희망을 희망하라”는 말을 외쳐본다. 나는 내 생각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행복하다.   이곳에서 만난 동우들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을 때, 또 다정한 말을 건네주는 분들을 만나면 그 순간 나는 매우 행복해지고 사람의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요즘은 사람들은 가족이라고 해도 일 년에 몇 번도 못 만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웃이 사촌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마음으로 요즘 이곳에서 만나는 분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나의 이 모든 변화는 인문학 박 교수님의 명강의가 가져다준 결과이다. 한 말씀 한 말씀 들으면서 깨달음을 얻으며 마음속으로 깊은 감명을 받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변화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좋은 강의를 더 많은 사람과 같이 듣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소개한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똑같은 현실이지만 생각을 바꾸면 삶이 변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써본다. 그 우울하고 슬펐던 생각이 변하여 이제는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행복한 생각을 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은혜를 베푸시어 이와 같은 마음과 생각을 주시고 이것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올 한 해도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롭고 아름다운 일들을 기대하며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강정순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7-03-23
  • 2017년 인문학 개강을 맞으며
    오늘은 2017년 1월 12일 목요일이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인문학 개강일이다. 나는 일찍 일어나 집안일을 정리하고 복지관으로 향했다. 교육준비가 제대로 되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강의실을 둘러보고 책상과 의자를 점검했다. 등록 숫자에 맞추어 38명이 수강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있었다.   시간이 되자 강의실로 들어서는 교수님과 기쁜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니 개강일이 더욱더 실감 났다. 교육시간이 되니 교실이 꽉 찼다. 강의가 시작되면서 6명이 더 참석하였다. 총 42명이 강의실을 찾아 인문학 강좌는 성황을 이루었다.   나는 지난해 인문학반 원우들을 대표해 경기도평생교육원에서 실시한 동아리 수기 공모에 응모했다. 이것이 우수상으로 평가받았다. 내 개인이 받은 상이 아니기에 관장님께서 인문학반을 찾아 수상식을 하기도 했다. 관장님이 인문학반을 찾아와 박 교수님과 인사를 나누고 시상식을 했다.         관장님은 경기도 31개 시·군·구에서 활동하는 모든 동아리 가운데 우수상을 받은 것은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의 자랑이라고 격려했다. 아울러 “우리가 발간한 《시니어들의 인문학여행》을 전국에 보급한 결과 ‘시니어 인문학’은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어 감사한다”며 “올해도 열심히 배우고 익혀 ‘시니어 인문학’의 대표 주자라는 자부심을 더욱더 드높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17년 1학기 등록 인원은 계속 수강 인원 25명, 처음 수강 17명으로 총 42명이다. 개강일인 오늘 눈이 내려 조금 걱정했지만, 푸근한 날씨에 내린 눈이어서 다들 하늘의 축복이라고 반가워했다. 수강 어르신들의 얼굴은 오늘따라 더욱더 해맑고 환해 보였다.   나는 1시간 강의를 끝내고 휴식시간을 이용해 출석을 확인했다.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협조해주신 어르신들께 감사를 전했다. 이 시간 반장과 총무를 선출해야 하기에 반장선출 안건을 공지했다. 부족한 내가 2017년을 맡게 되었고 총무로는 우리 반 최연소 강정순 원우가 만정일치로 선출되었다. 나는 우리 인문학반의 마당쇠 역을 충실히 수행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총무도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겠다고 다짐함으로써 인문학반의 2017년 출발 준비가 완료되었다.         교수님께서 강의 끝부분에 노사연의 <바람>이란 노래를 들려주었다. 멜로디도 좋았지만, “사막을 걷는다 해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가사에 모두 큰 감동을 하였다.   우리 시니어들은 아름답고 우아하게 나이 먹어 가는 삶을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우리가 배우는 시니어 인문학은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에서 출발해 도도한 물결처럼 전국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 일에 우리가 주역으로서 멋있고 힘 있게 쓰이기를 원한다. 책도 출간하며 다양한 프로젝트도 실행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지난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며 최선을 다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시니어협회’로 꽃이 피었다.   나는 “정부에서 인문학 진흥을 위해 연간 2,000억 원을 투자하여 이공계 대학생들도 인문학을 공부하게 하는 시스템을 마련했다”는 신문기사를 접하며 또 한 번 자부심을 품게 된다. 우리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 인문학반은 시대를 앞선 계획과 실천으로 ‘시니어 인문학’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 인문학반 시니어들은 인문학적 사고력과 통찰력을 갖춘 멋진 모습으로 새로운 청춘을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런 시니어들을 잘 섬기며 700만 명이나 되는 베이비붐 세대의 희망을 창출하는 데 이바지하려고 한다. ‘사람책도서관’ 활동을 통해 우리 시니어들의 경험과 지혜를 모든 국민이 공유하여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갈 계획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명랑하게 바꾸어 나가는데 우리 시니어들이 선구적 역할을 하게 만들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져본다. 유럽의 성당 첨탑에는 수탉모형이 바람개비와 함께 돌아간다. 이것은 닭이 울이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상기하게 하는 것이다. 올해를 상징하는 동물이 상징이다.   새벽닭의 울음소리가 사람들을 잠에서 깨운다. 이처럼 우리 인문학반 시니어들도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만인들을 깨우는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힘찬 도약을 이루어 갈 것이다. 배영환 취재위원
    • 인물이야기
    • 나의인생
    2017-01-27
  • 가치를 아는 사람이 가치 있게 산다
    어떤 보석상이 수석 전시회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한 돌멩이 앞에 매겨진 값은 15달러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돌멩이는 원석이었다. 전시회 주인에게 정말 15달러인가를 재확인했다. 그러자 주인은 오히려 5달러를 깎아주어 그 원석을 10달러에 샀다.   보석상은 10달러에 사 온 원석을 다듬어 목걸이, 팔찌, 반지 등으로 아름다운 보석으로 디자인했다. 이 원석을 가공해서 판 보석상은 무려 228만 달러 (약 26억)을 벌었다. 만 원짜리 돌멩이가 26억 원으로 변한 것이다.   보석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보석을 귀하게 여긴다. 자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함부로 살지 않고 값진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한다.   가치는 좋음과 나쁨·옳음과 그름·아름다움과 추함 등에 대한 사람들의 신념과 감성의 체계를 가리킨다. 어떤 건물에 불이 났을 때 그 건물이나 다른 물건은 잃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고자 구조작업을 한다.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 20대에 나 자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때가 있었다. 이런 탓으로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할 때도 있었다. 그제야 내 가치와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건강을 잃고 난 후에야 건강이 귀한 줄 알고, 돈을 잃고 난 후에야 돈이 귀한 줄 안다.   사람을 잃고 난 후에야 그 사람이 귀한 줄 알고 좋은 것을 잃고 난 후에야 그것이 좋은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것이 바로 어리석은 모습이다.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정한다. 나 자신의 가치가 소중함을 알 때 말과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진다. 세상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삶의 책임도 내가 진다. 일과 직업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놀고먹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그만 일이라도 그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맡은 일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자부심을 길러야 한다. 이런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책임을 전가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는다.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봉사를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며 기쁨을 나눈다. 언제, 어디에서나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기본적인 질서를 지키며 긍정적인 삶을 산다. 욕심을 버리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여 비생산적이고 헛된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조화를 이루며 기쁨을 창출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는데 자아실현의 욕구가 가장 상위에 있다고 했다. 그 아래에 계층적으로 존경, 소속과 애정, 안전, 생리적 욕구가 있다고 보았다. 이 이론은 하위에서 상위로 욕구가 옮겨가고 단계적으로 충족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자신이 괜찮은 조직이나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은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나는 인문학반에 출석하면서 여기에 소속된 자부심으로 굉장한 힘을 얻으며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을 보게 된다.   소속감이 없는 사람은 외롭다. 외로움 속에 사는 사람은 항상 우울하다. 우울증이 오래되면 치매가 된다. 공동체라는 소속감을 느끼고 살 때 외로움을 이길 수 있고 치매를 극복할 수 있다. 소속감을 느끼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발견했다고 볼 수 있다. 좋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자신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곧 행복을 꽃피우고 누리는 일이다.         이제는 60~70세는 노인이 아닌 시대이다. 하지만 육체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에서 노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 좋은 소속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귀한 소속감을 위하여 열심히 뛰고 있는 박요섭 교수님은 시니어들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다. 시니어 자신들이 국가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재능을 가치 혁신하여 아름다운 삶을 펼치도록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 시스템에 몰려와 소속감을 누리며 좀 더 나은 삶을 실현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모든 갈등은 인간관계에서 온다고 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문제행동의 원인은 소속감의 결여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사람들은 내 생각과 맞지 않으면 핑계를 댄다. 그러나 핑계를 찾기 전에 대안을 찾아야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많은데 왜 고독할까? 소속감이 없을 때 고독을 느낀다. 소속감은 자존감을 높여준다. 자존감이 높아질 때 정서가 밝아지고 감정의 기복이 사라진다. 자존감은 자신감으로 연결되어 긍정의 힘을 창출하게 한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도전과 열정이 분수처럼 힘차게 솟구친다. 자신이 소속되어있는 곳에서 사랑의 마음이 싹트고 봉사의 삶이 꽃핀다.   하고 싶어지고 만족함을 누린다. 가치 있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 가치 혁신을 통하여 더 많은 것을 보급하며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 아인슈타인은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고 말했다.    시각 장애인으로 미국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을 지낸 강영우 박사는 자신의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안 그의 삶은 <빛은 내 가슴으로> 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다.   사람은 가치 있는 사람보다 성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순간 살아갈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 지식이 부족하다고, 돈이 없다고, 내 옆에 아무도 없다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넋두리하지 말라. 대신 자신의 평범한 삶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창출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생각에 따라 삶의 형태는 달라진다. 누구나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신의 본래성을 인식하고 알아갈 때 가장 자신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이만 하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면 그에게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찬란한 행복과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유정애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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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인생
    2017-01-27
  • 내가 한 단 한 번의 결혼 주례사와 아픈 기억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다가 결혼식 주례 사연이 적혀있는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책갈피 사이에 누렇게 바랜 채 끼어있는 그 쪽지는 나를 40대의 추억으로 빠져들게 했다.   1980년대 결혼식은 지금에 비하면 소박하고 촌스러웠다. 그때 나는 남들처럼 결혼식에 자주 참석한 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신랑·신부와 하객들 앞에서 주례사를 멋지게 해 봤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유명인도 아니고 평범한 직장인인 내게 누가 주례사를 부탁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주례 예약에 밀려 동분서주하는 남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아내와 어린 자식들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 것 같아 괜한 심술이 났다.   내 평생 한 번 만이라도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어 보았지만, 그냥 세월만 갔다. 그러다가 1984년 내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하늘의 별 따기 같은 평생소원을 이룬 셈이니 이만저만한 자랑거리가 아니다.   결혼식 주례를 부탁한 사람은 고향 후배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헤어졌다가 입대 전에 잠깐 만났었을 뿐 오랫동안 소식을 모르고 있었는데 전화 연락이 왔다. 그때 나는 40세였고 학부형인데, 39세인 그 친구는 아직도 노총각이었다. 지금이야 그 나이가 뭐 별거냐 하겠지만 그땐 홀아비나 마찬가지였다.   그 친구는 자기 결혼식이 4월 29일이니 참석해 달라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며 참석 의사를 전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결혼식 사회를 꼭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내 나이에 아무래도 어색하긴 했지만, 이유를 달지 않고 알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이게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식을 성수동 자기 형 집에서 전통방식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자신이 없어 못 하겠다고 거절했으나 하도 조르는 바람에 응낙하고 말았다.   어느덧 결혼식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막상 사회를 맡아 진행할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 보통 예식장에서 하는 것이라면 사회자는 그냥 정해진 순서대로 하면 된다. 하지만 전통결혼식은 구경한 지도 오래되어 자신도 없는 데다 주례자가 사회까지 맡아 모두 진행해야 하니 큰일이었다. 지금이야 관련 자료를 쉽게 얻어낼 수 있지만 그때는 누구한테 조언도 들을 수 없어서 큰 고민이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쉽게 풀어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게 가정대백과사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1년도에 삼중당에서 출판한 1,600쪽의 두꺼운 책이다. 넉넉지 못한 신혼살림임에도 꼭 가져보고 싶어 큰맘 먹고 거금을 주고 할부로 구매한 나의 유일한 지식 보물창고였다. 지금도 낡고 빛바랜 채 책장에 진열되어 있는데 꺼내서 책갈피 줄을 위로 당겨보니 곧바로 구식결혼에 관한 내용이 펼쳐졌다. 33년 전에 여러 번 읽고 고심했던 흔적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그 책에 보니 전통혼례에 대하여 상세히 나와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 송나라의 4례 예식을 따랐다. 신랑 집에서 신붓집으로 사주를 보내는 납채(納采), 신붓집에서 택일단자를 보내는 연길(涓吉), 신랑 집에서 신붓집으로 예물과 폐백으로 청실홍실을 보내는 납폐(納幣), 신랑이 친히 신붓집에 장가갔다가 예식을 치른 후 신부를 맞아 오는 친영(親迎)의 4례다. 그렇다면 친구가 내게 결혼식 사회를 부탁한 의도는 결국 신랑 집에서 친영의식인 초례식을 진행해 달라는 셈이었다.     나는 그 초례식을 상상하며 주례로서 진행해야 모든 것들을 꼼꼼히 메모했다. 볕가리개와 병풍, 신위 상과 정화수를 준비하고, 신랑은 사모관대, 신부는 나삼에 칠보 족두리를 하고 연지를 찍는다. 신랑이 신부에게 한번 절하면 신부가 두 번 절하고 답례로 신랑이 한번 절한다. 이어서 신부가 일어나 재배하면 신랑이 답례로 한번 잘함으로 상견례를 마친다.   이후 향을 피우고 재배하므로 하늘에 부부 됨을 알리고 맹세를 한다. 이어서 청실홍실을 감은 축복의 술잔을 신부가 신랑에게 건네면 조금 마시고 신부에게 건네서 마시게 한다. 다음 반대로 한 번 더한다. 이어서 맞절을 하고 축하객에게 인사한 후 신위에 재배하면 초례가 끝난다는 것 등을 메모했다. 그리고 친구에게도 설명하고 준비하게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뭔가 허전했다. 내게 제일 중요한 관심사인 주례사가 빠진 것이었다. 전통예식에는 별도의 주례사가 없다. 평생소원이 주례자가 되어 품위 있게 주례사 한번 멋지게 해 보는 것인데 고작 사회자로만 끝낼 것을 생각하니 너무 안타까웠다. 모처럼 굴러온 기회를 놓칠 것 같은 조바심에 생각을 바꿔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주례사를 순서에 넣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주례사라는 말이 격에 맞지 않을 것 같아 고심 끝에 묘안을 찾아냈는데 주례사를 축사로 바꾸면 되겠다 싶었다. 내 잣대로 정했지만, 기분은 최고였고 마음도 편해졌다.   내친김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축사를 근사하게 써보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글쓰기가 맘대로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종이쪽지에 내 나름대로 요점만 간단히 적어 철저히 준비했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이발은 물론, 정장까지 차려입고 한껏 모양을 내고서 결혼식을 할 장소에 도착하니 모두 반겨 주었다. 여기저기 살펴보니 넉넉지 못한 형편임에도 마당에 볕가리개를 쳐서 햇빛을 가려놓고, 병풍이며 초례상 등을 그런대로 잘 차려놓았다.   친구인 신랑과 눈인사를 한 후 메모한 순서대로 맞절도 시키고, 술잔도 오가게 했고, 반지도 서로 끼우게 하며 잘 진행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일반예식장에서 하는 성혼선언문까지 낭독한 것은 좀 과했나 싶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로지 나에게 중요한 것은 주례사였다.   이윽고 기다리던 주례사를 할 시각이 되었다. 주례사가 아닌 축사로 격하되어 좀 아쉽기는 했다. 나는 약 5분 동안 주례사를 하는 기분으로 축사를 위엄 있고 힘차게 외쳤다.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여 적어본다.   축사 우리는 1년을 기대하며 곡식을 심고, 10년을 기대하며 나무를 심고, 100년을 기대하며 사람을 심는다고 한다. 오늘 100년을 위해 사람을 심는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혼이란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며 가는 것이다. 한자 사람 인(人)자의 모양을 설명하며 서로 의지하며 살라고 했다. 신랑과 신부를 두 개의 질그릇으로 비유하며 사용하기에 좋은 그릇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1.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해야 한다. 용서와 이해로, 상대의 좋은 것은 빨리 보고 나쁜 것은 더디 보라. 또 서로 관심을 가지라는 뜻에서 악의 두목 선거에서 무관심이 전쟁과 질병을 물리치고 선출된 예화를 들려주었다. 2. 씻어낸 질그릇에 사랑을 담으라 했다. 혹자는 자신, 돈, 쾌락, 지식, 지위, 권세를 담으나 희생적인 사랑을 담아라. 또 목표와 꿈을 담아라. 꿈이 없으면 실패한다고 강조했다.   여기 까지다. 그다음은 메모한 쪽지가 없어져 다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축복받으며 행복하게 잘 살라고 했을 것 같다. 모든 것을 마치고 마루에서 국수 한 그릇을 대접받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에게 자랑하니 아내도 덩달아 좋아하며 아이들한테 나를 치켜세워주었다.   그 후 열흘 정도 지났을 즈음 친구에게 전화하여 신혼 재미가 어떠냐고 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그들은 나를 크게 실망하게 하고 말았다. 결혼 일주일 만에 헤어지고 만 것이었다. 아름답고 소중하게 기억될 나의 보람을 그들이 한순간에 날려 보낸 것이다. 친구가 하는 말이 신부가 가정이 있는 유부녀였고 나이까지 속여 사기 결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나름대로 마음을 다해 위로해 주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그들이 너무 미웠다. 잘 살기를 바라며 축사 아니, 주례사까지 했는데 사기 결혼이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결혼식 진행을 위해 백과사전을 찾아보며 열흘 동안이나 정성껏 준비했던 나의 수고가 일순간에 사그라진 것 같아 너무 공허했다. 그 친구는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고 있는데 남의 속도 모르고 그냥 편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33년이 지난 요즘의 결혼식 주례자들은 어떤 마음일까? 세대 구분 없이 이혼하는 가정이 너무 흔하다 보니 주례를 부탁받으면 선뜻 두려운 마음부터 들 것 같다. 그래서 주례 없는 결혼식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주례 덕분에 행복한 가정을 꾸몄다는 보람과 성취감에 많은 주례자는 그 임무를 계속 이어갈 것 같다.   주례자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결혼식 끝나기가 무섭게 여행을 떠나는 요즘의 신랑·신부들이 성혼선언을 해준 주례자의 이름과 주례사의 내용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주례자와 주례사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주례자는 성혼선언만 한 것이 아니라 이혼을 막아낼 책임도 있다.   이제껏 단 한 번 한 결혼식 주례사인데 그만 아픈 추억이 되고 말았다. 33년이 흘러간 지금도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그 일이 못내 안타깝게 느껴진다. 물론 그 일은 애당초 남을 속인 잘못된 일이었기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러나 정상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진 결혼이라면 이혼은 절대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일이며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는 매우 성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최병우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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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7
  • 자신을 가장 복되고 아름답게 꽃피우는 지혜
       사람들이 함께 무엇을 하려면 기쁜 일도 있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많이 생긴다. 여러 사람이 마음이 하나 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성품과 생각이 다르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지만 양보하고 조화하면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내 생각만 고집하면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옆자리에 앉아 웃고 즐기며 음식도 함께 나누어 먹다가도 내 생각과 다른 상대와는 충돌한다.         관계성은 사람의 매우 주요한 특성이다. 우리는 어울리는 사람과 함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에 따라 삶의 모습은 달라진다.   가족끼리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 여러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갈등도 공감으로 바꾸면 조화로 꽃이 피게 된다.   사람 관계는 삶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다. 좋은 관계는 좋은 번짐으로 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쁜 관계는 나쁜 번짐으로 상대방을 인생의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다. 용서와 양보와 배려가 꽃피면 관계를 아름답게 변화한다.   우연히 목격한 장면이다. 그동안 옆자리에 앉아 서로 챙겨주며 재미있게 지냈던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을 보았다. 이유는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했다는 것이다. 본의와는 다르게 뜻이 잘못 전달되어 모욕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진실한 마음과 바른 소통은 이런 문제를 잠재울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잘못을 지적당하면 싫어한다. 아니 분노한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자존심이 짓밟혔다고 생각한다. 자존감을 상실해 버리고 만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양보와 타협, 조화와 협력은 평화의 밑거름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지 못할까? 이기심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더 적극적으로는 조화를 위해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아울러 타인을 존중하며, 배우려는 생각과 실천을 게을리 지하지 말아야 한다.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사람은 유연하고 따뜻한 자세를 보인다. 이런 사람은 봄에 피는 꽃처럼 주변의 사랑을 받으며 기쁨을 주게 된다.         누가 알려주지 않음에도 식물은 자신이 꽃피울 때를 정확하게 알고 꽃을 피운다. 이것이야말로 식물의 원천적인 메커니즘이다. 이와 비교해보자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제때에 드러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다스리며 가치를 발현하는 지혜를 아낌없이 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됨의 가치를 복되게 드러내며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게 사는 길이라고 할 것이다. 유정애 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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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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